[설교노트] 부활

마가복음 16:1-8

부활

제가 지난 주에 고난 주간 묵상집을 나눠드렸었는데, 좀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순교”라는 주제로 묵상집을 나눠 드렸던 것은 그 분들의 죽음이 아니라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원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순교자라고 하면, 이 분들의 죽음에 대해서 보통 생각을 합니다. 왜 죽었는가 어쩌다가 죽었는가.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 분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기에 그런 죽음을 택할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순교자를 본받아야 한다고 해서 우리는 지금 당장 죽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 스스로도 믿음을 위해 당장 죽을 수 있냐고 하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우리의 자리에서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초기 기독교의 지도자들을 교부라고 하는데요, 교부들 가운데 어거스틴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기독교 신앙 구조를 정립한 매우 중요한 분입니다. 하버드 대학의 화이트헤드 교수는 모든 철학이 플라톤의 각주라면,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각주라고 정의할 정도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삶을 신학적으로 돌아보는 “고백록”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어거스틴은 어린 시절 소위 말해 세상적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습니다. 한 여성과 동거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휴가 중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창밖에서 아이들의 노랫소리 한 가락이 어거스틴의 귀를 자극했습니다. 그 노래말은 “들어서 읽어보라”(Tolle Lege)였습니다. 어거스틴이 그 자리에서 성경을 피자 로마서 13장의 말씀이 그 눈에 들어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3:13)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어거스틴은 뜨거운 회심을 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 할지라도 어거스틴은 끊임없이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연약한 존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거스틴을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바로 그가 깨달은 시간 관념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시간에서 살고 있습니까? 어떤 시간이 여러분에게 중요합니까? 과거가 중요한가요? 그런데 우리는 과거를 과도하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추억으로 변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 추억하는 시간으로 정말 돌아간다면, 그 시간은 그리 좋은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게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꿈꿉니다. 내일은 뭔가 더 일이 잘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내년이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우리는 미래라는 시간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말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시간, 그리고 우리에게 의미있는 시간은 오직 현재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현재라는 시간 역시 그냥 스쳐지나가는 시간이기 때문에 우리 지금 숨쉬고 있는 이 절대적인 지금의 순간이 의미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우리가 제일 과소평가하고 있는 시간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아닌지요. 내일이면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것 같고, 과거 나는 좀 더 나아보였던 것 같지만, 두 시간 모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시간들입니다.

어거스틴은 스스로가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지 못할 때, 좋지 못한 과거의 기억이 자신을 사로잡고, 미래의 삶 또한 악하게 흘러갈 것이라는 것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이 순간, 현재의 삶에서 온전하게 살기 노력했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던 이들은 그들의 현재에서 자신들이 믿었던 바를 매 순간 지켜냈던 사람들입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은 부활 사건에 관한 본문 입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찾아와 애도하고, 시신에 기름을 바르기 위해 무덤에 찾아 왔는데, 그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이 치워져 있고, 천사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여인들에게 전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은 여전히 예수님이 부활할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이 그들의 현재 속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부활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에게 소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이고, 죽음을 극복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의 법칙을 깨뜨리고 역행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얽매여 있는 이 세상의 규칙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부활은 현재적인 사건임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의 이야기도 많이 해 주셨지만, 이 땅에 관한 이야기, 이 땅의 문제들에 관해서 주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해라. 애통해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라. 이러면서도 이 땅에서 사는 것이 가능할까요? 최근 청년들을 만나고, 이런저런 고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는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실제로 성경의 원칙 대로 살아가면서, 서로 공생하고 연합하면서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경쟁이 아니라 상생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이 땅 가운데 실현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삶의 모델을 어떻게 이뤄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저는 이 공동체에서 이런 질문을 갖고 함께 고민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부활의 삶을 미래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현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서 우리는 어떻게 부활의 삶, 곧 하나님의 창조의 원칙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오늘 설교의 결론은 열려 있습니다. 저도 이제 이 일을 본격적으로 고민하며 살아가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함께 부활의 삶을 꿈만 꾸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고민하고 그렇게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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