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우연

19.05.05. 청년부

룻기 2:2-4 우연

오늘날 우리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학이라는 학문이 오래 전에 생겨난 이래로, 사람들이 끊임 없이 고민하고 연구하는 목적은 바로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어떻게”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떻게” 형성되어왔고, 또한 “어떻게” 변화되어 나갈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과학자들은 지구 밖의 드넓은 세계인 우주를 탐구하는 상대성 이론이나 빅뱅이론과 같은 우주론을 발전시켜왔고, 우리의 몸과 이 세상을 형성하는 근본 원리를 알아내기 위해 아주 미시적인 세상을 탐구하는 양자 역학과 같은 학문을 발전시켜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학 분야들이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은 이 세상과 우리 존재의 형성이 매우 복잡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의 진화 과정에 있어서 화학 물질들이 혼합되어 유기물을 이루는 과정, 그리고 유기물이 세포를 이루고 복잡한 인간으로 진화해 나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획기적인 진화의 과정 가운데 필연적으로 우연이라는 개념을 이야기합니다. 어떤 상위 계층으로 진화하기 위해서는 유전자들의 배열이 극적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이것은 마치 모래들이 바람에 날리다가 사람의 모양으로 배열되는 것보다 더 낮은 확률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주론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시작을 이야기하는 빅뱅 이론에서 빅뱅의 발생은 어떻게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거대한 폭발을 했고, 그 폭발의 과정 가운데 가스의 형태를 띈 다양한 원소들이 뭉쳐서 행성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태양과 달과의 적당한 거리를 둔 덕분에 그렇게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생명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이 되었고, 비교적 안정적인 지질 구조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우연이라는 개념을 빼 놓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이 세상의 복잡성을 이처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냥 이 땅에 어느 순간 나타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 억년의 역사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굉장히 희박한 확률의 연속, 우리들이 말하는 우연의 연속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박한 확률, 우연이라는 개념은 생명의 경이로움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존재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일까라는 고민을 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과학은 “어떻게”에 대한 설명을 굉장히 상세하게 해 주기는 하지만, 결국 “왜”라는 영역의 질문에 답을 해 주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집중할 뿐, 비가시적인 영역은 탐구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 철학의 분야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은 해 주고 있습니다.

리차드 도킨스는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 우리의 역사를 주도해 온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유전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유전자는 본래적으로 “생존을 위한 이기심”을 가지고 있어서 생존에 편리한 방식으로 인간을 진화시켜 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존재는 유전자의 survival machine, 즉 생존기계라고 리차드 도킨스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몫은 유전자를 위한 좋은 생존 기계가 되어서, 좋은 유전자를 후대에 잘 전수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리차드 도킨스는 인간이 살아온 역사의 원동력을 유전자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타주의적인 희생을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전체 공동체의 지속성을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진화론적 과학 철학에서 말하는 인간관은 굉장히 기계적인 인간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연하게 이 세상에서 존재하기 시작했고, 수백만년의 수명을 가진 유전자에 의해 종속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관의 근본은 바로 우리가 특별한 목적을 가지지 않은 존재, 즉 우연적인 존재라는 데에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올 해 모임 첫 시간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성경은 인간의 본래 목적과 본질에 대해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저는 문자 그대로의 창조론자는 아닙니다. 과학에서 설명하는 인간과 이 세상의 복잡성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 세상을 단순하게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이 복잡한 메커니즘과 구조 속에서 생존하고 진화해 나가도록 이 세상을 만드신 것입니다. 신앙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이 세상을 너무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욥기 38장에서 하나님은 욥에게 이 세상의 복잡성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복잡한 원리와 구조는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원리를 우리가 인정하는데에서 우리 자신을 신앙적인 기준으로 바라보기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우연”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의 핵심은 바로 “우연적인 사건”의 의미입니다. 나오미와 룻이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어쨌든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룻은 먹을 것을 구하러 밭으로 갑니다. 당시는 보리와 밀을 수확하는 절기였는데 밀과 보리를 베는 사람이 자신을 잘 이해해 주면, 곡식을 벨 때 떨어지는 이삭 알갱이를 주워 오겠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25:4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신명기의 위 말씀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곡식 떠는 소가 떨어진 낟알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약자를 넘어서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 먹을 권리를 인정해 주라는 것이죠. 바로 이러한 율법의 정신을 잘 실천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왜냐하면 룻이 나중에 보아스와 결혼하는 장면에서 율법이 또한 중요한 핵심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나눠볼 것입니다.

룻의 베들레헴에서의 삶의 시작은 굉장히 막막합니다. 자신과 시어머니를 도와줄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이들의 생존은 보장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성경은 바로 우연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룻이 “우연히” 간 곳이 룻의 시아버지가 되는 엘리멜렉의 친척 보아스의 들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우연한 룻의 발걸음을 통해서 어지러운 사사시대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사가 진행되기 시작한 <o것입니다.

룻은 이 우연이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룻기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이 아닌 사람들의 선함을 통해 역사하시는 숨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말하는 책입니다.

우연은 우리 의지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을 말합니다. 룻이 알고 그 밭에 간 것이 아니라 간 곳이 보아스의 밭이었고, 그 곳에서 보아스와 아름다운 인연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생활을 살아가다 보면 우연적인 사건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의 인생이 바뀌기도 합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 의지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자유의지를 받아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여지는 많이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움직여 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우연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내 가운데 역사하심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연을 말 그대로 우연이라고 치부한다면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기계적인 삶을 사는 존재임에 불과하지만, 우연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하면 나는 내 삶의 의미와 방향을 깨달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룻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읽어나갈 것입니다. 앞으로 우연적인 사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계속해서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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