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누구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19. 5. 12. 청년부

룻기2:10-12

누구를 통해 하나님은 일하시는가?

지난 시간에는 “우연”이라는 주제를 통해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과 그 은혜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는가를 나눠 보았습니다.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우리의 통제 외에 있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룻은 그의 시어머니의 친척인 보아스가 소유하고 있는 들판에 “우연히” 도착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이삭을 주울 것을 허락 받습니다. 어쨌든 조금씩 룻과 나오미의 삶이 베들레헴에서 정착되기 시작하지만 안정된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이들의 삶의 불안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오미와 죽은 그의 남편 엘리멜렉은 10년전에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분명히 이들은 베들레헴에 두고온 땅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농사를 지을 남자가 없었으니 생계를 이을 일이 막막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율법에 따르면 땅에 대한 문제를 매우 민감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 사회에서 땅은 유일한 생산 수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 땅의 문제가 아주 민감하지 않습니까? 땅을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부가 결정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유명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쓴 “사람은 얼마 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바흠은 자신만의 농지를 너무나도 갖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던 중 바슈키르라는 곳으로 가면 헐값으로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선물을 준비해서 그 곳의 족장을 만납니다. 그 마을의 족장은 바흠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아침에 동틀 때부터 해가 질 때까지 바흠이 밟은 땅만큼 그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단, 해가 지기 전까지 출발 지점으로 돌아와야 하는 것이 조건이었습니다. 바흠은 마음이 너무나도 설레여서 밤잠도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아침에 족장을 만나러 갔습니다. 그는 아침 일찍 출발해서 숨을 헐떡이며 한 평이라도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뛰고 또 뛰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새 하늘의 해가 기울기 시작한 것을 뒤늦게야 깨닫고 다시 출발 지점으로 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뛰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출발 지점으로 돌아왔지만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그가 죽어 묻힌 땅은 6피트 길이의 땅에 불과했습니다.

톨스토이의 이 이야기는 인간의 땅에 대한 과대한 욕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필요한 땅보다 더 많은 땅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 하고, 자기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음을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역시 땅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농경생활의 시작과 함께 땅은 그 사회 구조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은 기근 가운데에서도 버텨낼 수 있었지만, 땅을 조금밖에 갖지 못한 사람은 고리로 양식을 빌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경제의 악순환이 이루어지면서 땅을 팔아 소작농으로 전락하게되고, 마침내 노예가 되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던 것입니다.

성경은 사람, 특히 히브리인을 종으로 부리는 것에 민감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출애굽 사건을 통해 히브리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시 히브리인이 노예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신 출애굽의 은혜를 역행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자유인이 노예가 되는 시발점은 땅을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 땅을 마음대로 매매하지 못하도록 금지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땅을 팔아야하는 상황이 생기면, 땅을 산 사람이 나중에 산 값으로 되팔거나 희년이 되면 돌려주라는 것이 땅에 대한 성경의 법입니다. 이런 과정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종이 된 사람들도 7년 일한 후나, 희년 때에 자유인으로 돌려 보내라는 것이 율법에서 추구하는 자유의 정신입니다.

나오미 가족의 경우가 바로 이에 속합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베들레헴을 떠나 오기 전 자신들이 소유했던 땅을 친척에게 넘겨주고 모압 땅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 이후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나오미는 남편도 없이 이방인 며느리를 데리고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땅에서 농사를 짓지도 못하고, 남의 땅에 가서 떨어진 이삭이나 주우면서 연명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때 바로 나오미의 남편의 친척이 되는 보아스가 자신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모압여인 룻을 발견하게 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큰 친절을 베풀게 됩니다. 나중에 우리가 보게 되겠지만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기는 했지만 이들의 땅을 돌려줘야 하고, 이들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 의무를 가진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아스는 이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룻기는 궁극적으로 땅과 자산에 대한 율법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베풀고 있는 긍휼의 마음의 핵심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을 자신의 삶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룻을 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아스는 자신이 룻의 시어머니를 향한 헌신에 대해 알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보아스는 그런 헌신을 보여준 룻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축복하며 이야기합니다. 룻과 보아스는 지난주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우연하게 그 땅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우연이 우연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로 만들기 우해서는 자기 스스로  준비되어 있어야 함을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룻은 보아스를 만나기 전에, 시어머니를 향한 인애의 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보아스는 그런 룻에게 인애의 마음을 베풀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 모두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았든, 자신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의 모습을 실천하고 있었고, 이런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 역사를 이루어가기 시작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혼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이들과 연합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이들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대해야 할까요? 다른 이들을 기능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룻기에서 나타나는 인애와 긍휼의 마음의 근본은 바로 다른 이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는 고귀한 존재로 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토지 소유의 개념 역시 이런 생각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을 기능적인 존재나 내 것을 채우기 위한 착취의 대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작년에 여러분들이 헌금을 함께 모아서 캄보디아 전도사님 한분을 후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일은 지속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작은 마음을 모아 후원하는 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지 모릅니다. 룻기는 이런 작은 마음들이 나중에 폭풍과도 큰 나비효과를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우선적으로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우리는 우연하게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그야말로 우연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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