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빼앗긴 법궤

사무엘상 4:10-11

빼앗긴 법궤

슬라이드

오늘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법궤를 빼앗겨 버린 이야기입니다. 법궤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고의 성소라 할 수 있는 성막 중에서도 가장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지성소 안에 들어 있는 가장 중요한 성전 기구입니다. 그러나 전쟁 중에 법궤가 빼앗겨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사건으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헤서는 종교 자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종교라는 것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을까요? 아마도 여러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중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죽음에 관한 문제였을 것입니다. 고대의 유물들을 살펴보면 우리가 언뜻 생각하기에 동물의 지능에 가까웠을 것이라 생각했던 원시 인류조차 시신을 매장하는 풍습을 가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가운데 어떤 존재도 죽은 사체를 땅에 묻지 않습니다. 땅에 시신을 묻는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도 그 존재를 존중해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은 조상의 형상들을 만들어 보관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현재의 삶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이 죽음의 문제가 바로 종교를 본능적으로 가지기 시작했던 계기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신들을 섬기는 종교행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땅에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기르면서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만 농사를 잘 할 수 없다는 것을 언제부터인가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비를 적당히 오게 할 수도, 해를 조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조정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로 이런 자연의 힘이 자신들에게 유익이 되기도 하지만, 홍수나 기근 등과 같이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 있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음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점차 이런 자연을 숭배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즉, 사람들의 신 인식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부터 시작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해나 달과 같은 천체에서부터 주변에 보이는 나무나 돌 등을 일종의 신으로 인식하고 이들을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풍요를 위해 신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자신들이 바라는 결과가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어려움이 있을 때 이들은 자신들의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군가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특별한 이유없이 어떤 이들을 처벌하거나 심지어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한 결과, 눈에 보이는 풍요와 물질을 많이 차지하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는 세상의 구조가 형성되기 시작했고, 풍요의 종교가 이런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몫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종교 전통에서는 부유하고 높은 계급의 신들이 존재하는가하면, 힘 없는 노예신들도 존재하기도 합니다. 이런 구조를 그대로 이 사회에 적용해서 이 세상의 계급 제도를 당연시 여기는 사회 질서를 만드는 데 종교를 이용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물질주의적 가치관의 형성과 눈에 보이는 가치를 중요시하는 풍요의 종교의 발전은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이런 방식의 종교 전통들에 반기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만든 성막이나 성전을 보면 성경에서 강조하는 종교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통해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어떤 눈에 보이는 것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그렇기 때문에 성막이나 성전에는 하나님을 상징하는 그 어떤 기구들이나 형상들도 없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형상들이 모두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에 불과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도 하나님을 상징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약 성경은 하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딱히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한 분밖에 창조주가 없으니 계급도 없습니다. 참 재미없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늘나라의 모습에 대한 무관심은 오히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성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성전에 그리고 성막에 하나님을 상징하는 무언가가 있었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내팽게치고 그 곳에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기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디에 있던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할 때(왕하8장), 자신들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할 때 속죄가 나타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가 이전에 나누었던 한나의 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위에 상관없이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의 범위는 넓어집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종교의 본질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눈에 보이는 법궤에 의존하고 그것을 맹신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에 관한 말씀입니다. 법궤 역시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십계명 두 돌판, 아론의 싹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 항아리가 들어 있는데, 힘든 광야 시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어떻게 행하셨는가를 기억하게 하는 상징물들입니다. 이 기념물들이 하나님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맥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백성들과 전쟁을 하게 되는데, 이들이 1차 싸움에서 패배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전쟁에 진 이유를 “눈에 보이는 법궤”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지난 주에 나눴던대로 엘리의 아들들에게 문제가 있었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적인 상징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하고 단순히 하나님을 이용하려고만 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믿었던 법궤를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신앙을 도깨비 방망이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무언가 기도하면 뚝딱 나왔으면 좋겠는데 현실과 내가 바라는 마음 사이에 괴리가 생길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되고, 때로 신앙에 대해 회의가 들기까지도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법궤가 도깨비 방망이가 아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 의지와 목적이 하나님의 뜻과는 다르다면 그것은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물리쳤듯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못한 환경에 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들을 세워가는 과정임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고민이 많아지고 어려움을 느낄 때, 신앙생활한다고 별 것 없네라고 회의적으로 생각하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워가는 과정임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이었지만 결국 이들은 정작 중요한 본질이 무엇인지를 몰랐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신앙과 우리 삶의 본질을 의식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지난번에 나누었던 우연의 문제,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가치관의 문제, 그리고 오늘 나누었던 종교적인 상징물의 문제 이 모든 것들은 다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를 끊임없이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기도하는 우리의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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