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타성

19. 6. 3. 청년부
삼상 2:12-17
타성

지난 주에는 한나의 기도에 대해 나눠 보았습니다. 구약의 역사 가운데 한나는 평범한 사람이 성소에서 드렸던 첫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자신의 삶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달라는 간구였지만, 결국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먹고 사는 것과 관련된 고민은 굳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채워 주시는 기본적인 것이니, 우리가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할지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나는 그러한 기도의 본을 보여준 여인이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통해 사무엘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이런 한나나 사무엘과는 정 반대되는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제사장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사사기의 연장선상에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지난번에 룻기에 대한 말씀을 나누면서 사사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의 문제의 이유는 바로 이스라엘의 지도층이면서 하나님의 율법을 잘 가르쳤어야 하는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의 타락에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누구나 높은 자리에 오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워졌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이 우러러 보는 권력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목표를 위해서 다들 그렇게 노력하고 있는 것이겠죠. 그러나 이런 자리는 그만큼의 책임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크게 의식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내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가 아니라, 그 자리에 대한 집착만이 있을 때 타락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2장 말씀의 일부를 읽었는데요, 2장 1절에서 10절까지 한나는 사무엘을 주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을 통해 그녀는 우리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가 세상적으로 어떤 환경에 처해 있든지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이 되심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부터 줄곧 성경이 강조하는 바가 이 부분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여태껏 세상 가운데에서 배워온 삶의 가치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이가 없어 고민하는 한 여인에 불과했습니다. 룻은 남편도 잃고 이방인의 신세로 베들레헴에 하루 하루 생존을 고민하던 모압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 앞에 진실한 마음으로 살아갔을 때, 그리고 한나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통하여 역사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낳았을 때, 그녀는 사무엘을 서원한대로 엘리 제사장에게 맡기고 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갑자기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지도자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묘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늘 읽은 첫 구절은 엘리의 아들들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2절.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엘리의 아들들은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이 여호와를 몰랐다는 것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들이 매일 하는 일은 항상 성소를 돌보고 제사를 주관하는 일인데 어떻게 하나님을 알지 못했겠습니까. 그런데 12절 전반부에서 성경 기자가 언급하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엘리의 아들들의 행실이 나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쁘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윤리/도덕적으로 때로는 종교적으로 악한 일을 일삼는 이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12절 말씀에서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는 의미는 이들이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지 않고 살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식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가 그렇지 못하다면 성경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다.

흥미롭게도 사무엘상 1:16에서도 동일한 표현이 나옵니다. 엘리가 한나가 술 취했다고 오해했을 때, 한나가 자신을 악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즉, 엘리는 남의 행실에 대해서는 비판하고 관심을 기울였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들들의 문제에 대해서는 모른채 했던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의 도덕성 문제는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이 성소에 제물을 가지고 오면 그 제물을 착복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도 전에 자신이 원하는 고기의 부위를 빼앗아 가곤 했습니다. 성경은 이런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의 자리가 어떤 책임인지도 모른채 그 자리에서 권력만을 누리려고 했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하느냐가 본질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 드리는 것, 중요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이나 사역자들이나 동일합니다. 저는 제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나를 존중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예배 드리고, 교회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함에 있어서 제 사사로운 이익이 목적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세상에서 기독교인이라고 떳떳이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몇 년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기독교인이라는 타이틀은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교회라고 하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티비나 인터넷에서 목사들이 하는 막말이 얼마나 많이 나옵니까?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사역에는 이제 흥미를 잃고 정치권에 기웃기웃거리고 자신들이 세상에서의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양 호도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지도 모르는 채로 자신들을 최면하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서글픕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이 이런 사람들보다는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예배에 참석하면 좋긴 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공동체가 숫자 속에 매몰되지 않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올바르게 서기 시작하면 소위 대형교회 지도자들보다 여러분 한 사람이 더 귀하게 쓰임받고 다른 이들에게 더 큰 영향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의 일이든, 신앙 공동체의 일이든 모든 일에 진실한 마음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이제부터 선교적인 초점을 갖고 우리 공동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 나가려고 합니다. 선교라서 해서 뭐 거창한 것을 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작은 힘과 정성을 모아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경에서 말하는 것은 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하건 부하건, 높은 곳에 있던 낮은 곳에 있던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내 삶 속에서 감당하는가, 이 일에 대해 우리가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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