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노트] 사무엘과 사울

사무엘과 사울

사무엘상 10:16-21

지난 주에 우리는 성경이 원하는 왕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함께 보았습니다. 지난 주에 참석하지 못한 청년들도 있고, 지난 주에는 자세하게 다루지 않았으니 신명기 17장에 나와 있는 왕에 대한 규정을 다시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 그 땅을 차지하고 거주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모든 민족들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워야겠다는생각이 나거든 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을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신명기 17:14-15)

왕의 첫번째 조건은 반드시 이스라엘 백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이 되어야 할 사람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거쳐온 역사, 즉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셨고, 살리셨는지를 아는 이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자유케 만드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는 외국인의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는 병마를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병마를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지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신명기 17:16)

다음 규정은 왕이 병마를 많이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마는 당대 주력 전력이었던 전차 부대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병마를 많이 두지 말라는 것은 왕의 군사력을 제한하라는 의미입니다. 출애굽으로부터 가나안 정복 전쟁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번도 전차 부대를 갖고 싸운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나안 백성들이 전차부대를 이끌고 이스라앨 백성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기적적으로 승리하게 됩니다. 이를 통해 전쟁에서의 승리는 하나님에게 있음을 그들 스스로도 체험했고, 적들도 이를 체험했습니다(출애굽기 14:25). 왕은 군사력을 무리하게 키워 자신의 힘을 통해 백성들을 압제하거나 군사력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가리워지게 하면 안 됩니다.

또한 신명기 법은 병마를 얻는 것과 백성들을 애굽으로 보내는 것을 연관시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집트가 병마를 많이 길러내는 나라이고, 전차 부대가 많은 곳이기 때문에 이를 구입하기 위해 히브리 백성들을 이집트에 노예로 보내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출애굽 구원 사건을 역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아내를 많이 두어 그의 마음이 미혹되게 하지 말 것이며 자기를 위하여 쌓지 말 것이니라(신명기 17:17)

또다른 규정은 왕이 아내를 많이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고대 사회에 왕의 결혼은 정치적인 행위였습니다. 국가들 사이의 조약은 종종 결혼으로 체결되곤 했습니다. 병마가 군사력의 확장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왕의 결혼은 위 구절 후반부에서 언급되는 은금과 더불어 국제 관계와 교역을 통한 경제력의 확장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경제력 역시 왕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입니다.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은 그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겠지만 그 백성들은 왕에게 철저히 복종해야 하는 속박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를 경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에도 아내를 많이 두는 행위는 종교적인 타락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방 여인이 결혼을 통해 이방 종교와 그 사상을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해줄 위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예를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날이 장구하리라(사사기 17:18-19)

지금까지의 규정은 왕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대한 규정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규정은 왕이 해야 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을 곁에 두고 읽고 그대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통치자의 자질에 대한 핵심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이해하고 행하는 자가 왕의 자격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이럿듯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을 세우라고 명령하실 때에 조차도 그 왕의 모습은 여느 왕과는 달랐던 것입니다. 과연 이런 왕이 어떻게 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왕의 모습은 참으로 역설적입니다. 통치자라는 자리는 권력의 자리를 상징하는 것인데 오히려 그 권력을 최대한 내려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왕이 가능한 것일까요?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민주주의 사회이고 투표로 선출되고, 그 임기가 끝나면 실제로 그 권력을 내려놔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관예우라는 이름으로 그 권력이 실제로 유지되는 모습을 봅니다. 하물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상징하는 왕이라는 호칭을 가진 사람이 과연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이런 자격을 가진 이는 바로 권력을 두려워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높은 자리에 올랐을 때 권리를 누리기 보다는 엄청난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라는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9장에 처음 나타나는 사울은 본래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잃어버린 암나귀를 그의 일꾼과 함께 찾아 헤메이다가 사무엘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사무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사울을 왕으로 세우라는 말씀을 들은 이후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사무엘과 사울의 첫 만남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은 사을과 그의 집안을 칭송합니다. 그러자 사울은 자신이 아주 작고 작은 지파인 베냐민 지파의 아주 미약한 집안 출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사사기의 마지막 장에 잘 나타나 있듯이 이스라엘 지파들의 내전 가운데에서 거의 멸절되다시피한 지파였습니다. 베냐민 지파에 속한 일단의 사람들이 윤맂겅니 범죄를 저질렀고 이들을 처벌하기를 거절한 베냐민 지파를 향해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전쟁을 건 것입니다. 그 결과 베냐민 지파의 남자들이 거의 죽게되는 끔찍한 결과가 초래되었습니다.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 베냐민 지파는 그리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그 베냐민 지파의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레위 계보 가운데 힘이 다 빠져버린 집안 출신의 사무엘과 아주 작은 베냐민 지파 출신의 사울이 만나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세상적으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한 나라를 새롭게 일구어가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본래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끝까지 왕이 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왕으로서 가져야 할 책임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뽑을 제비뽑기를 했을 때 하나님의 뜻대로 사울이 뽑혔습니다. 그러나 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려워서 다른 곳으로 숨어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그를 왕으로 삼았습니다.

사울은 왕으로 임명된 후에도 자기가 하던 농사일을 하며 살아갑니다. 아직 체계적인 왕정 체계가 성립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 그 자신이 왕으로서의 자격을 백성들에게 완벽하게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의 동맹 길르앗 사람들이 암몬 사람들에게 포위당해 멸절당할 위기에 놓였을 때, 이들이 농사짓고 있던 사울에게 전갈을 보내 자신들이 위급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울은 두려움이 많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번에는 그가 하나님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어 노가 크게 일어났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삼상11:6). 두려움의 감정이 이제 용기로 바뀌게 되었고, 그런 사울이 군대를 이끌고 암몬 사람들에 맞서 나갔을 때 이들은 큰 승리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명량이라는 영화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영화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이순신 장군의 대사는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 있다면”이라는 대사입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두려움 속에서 당시 조선의 군사들과 백성들은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통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즉, 누군가 믿음직한 리더가 있음을 깨달을 때에 두려움은 용기로 바뀔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때로 나약한 것으로 생각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이 모든 것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게 하는 감정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의 감정이 때로 우리에게 절망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에게 무력감을 주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으로는 감히 할 수 없다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결국 두려움을 그냥 있는 그대로 놔 둬 버린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두렵기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결국 우리 앞에 놓인 삶의 벽을 넘는 원동력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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